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철학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다. 철학은 지식 체계가 아니라 하나의 사고방식, 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무엇을'이나 '왜'가 아니라 '어떻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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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달리 철학은 규범적이다. 철학은 세상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뿐만 아니라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까지 말해준다. 작가 대니얼 클라인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에게 다음과 같은 최고의 찬사를 던졌다. 에피쿠로스를 철학이라기보단 "삶을 고양시키는 시"라고 생각하고 읽을 것.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 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직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마르쿠스는 이러한 차이를 알았지만, 늘 그렇듯 스스로에게 그 차이를 다시 상기시켰다.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 스토아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우리 문화는 일반적으로 질문을 경험하기보다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 소로처럼 보는 법
소로는 이렇게 적었다. "관찰이 흥미로워지려면, 즉 중요한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삶은 삶을 가장 덜 인식할 때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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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데이터를 정보로 착각하고,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경향을 염려했다. 그가 눈 돌리는 곳마다 사람들은 정보를 통찰로 착각하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다. "정보는 그저 통찰로 향하는 수단일 뿐이며 정보 그 자체에는 거의 아무 가치도 없다는 걸 그들은 알지 못한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런 과도한 양의 데이터(사실상 소음)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정적이며, 통찰의 가능성을 없앤다. 소음에 정신이 팔린 사람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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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처럼, 인터넷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금욕적인 삶을 살거나, 미학적인 삶을 살거나.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 나는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 유예가 아닌, 더욱 풍성한 다른 세상으로의 침잠, 바로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음악 안에서 본 것임을.
🔖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규정했다. 우리는 존재의 차원에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긍정 정서의 차원에서 쾌락을 떠올린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말 그대로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우리를 만족으로 이끄는 것은 어떤 것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불안의 부재다.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를 뜻한다. 에피쿠로스는 향락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평정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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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피하라는 것은 타당한 조언이다(나도 여기에 찬성한다). 하지만 철학의 기반이 되기엔 너무나도 얄팍하지 않나? 고통에 빠진 사람에겐 그렇지 않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다.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상상해보자. 의사를 불렀더니 의사가 즉시 포도 한 접시를 권한다. 뭐가 문제인가? 포도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데. 그렇지 않은가?
에피쿠로스는 많은 사람이 이런 터무니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산더미처럼 쌓인 고통 맨 위에 사소한 즐거움을 올려놓고는 왜 행복하지 않은지 궁금해한다. 어떤 사람은 짧고 강렬한 신체적 고통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뭉근하게 이어지는 정신적 고통을, 또 어떤 사람은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상처받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지만, 어쨌거나 고통은 고통이다. 만족에 도달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 고통을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딱 한 번 태어난다. 두 번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삶이 우연의 결과물, 원자 운동에서의 일탈, 일종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삶을 찬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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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특히 내가 '조금만 더-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취약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조금만 더 많으면 된다. 하지만 조금 더 갖게 되면 우리는 눈금을 재조정하고 생각한다. 그저 조금만 더 있으면 돼. 우리는 얼만큼이어야 충분한지를 모른다.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 남는다.
🔖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우리는 자기 감정이 정확하다거나 부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우리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한다.
스토아학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감정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고전 연구자 A. 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우리가 잘못 이해했거나 갈피를 못 잡는다는 뜻이 아니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말 그대로 실제 경험과 다르다고 말한다.
🔖 다시 아빠스플레인을 펼친다. 인생은 이 다리처럼 일련의 끝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어. (...) 이 다리는 강철로 구현된 실존주의야.
"아빠? 상상 임신이 뭔지 알아? 임신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 증상은 다 나타나는데, 임신은 아닌 거야. 그냥 임신했다고 생각만 한 거지. 아빠도 상상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빠는 저 쿨하게 생긴 다리가 무슨 대단한 생각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엔 저건 그냥 쿨하게 생긴 다리야."
🔖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만화 속 미친 과학자는 온갖 모양과 색깔의 괴물로 가득한 방 안에 있다. 낙심한 채 커다란 레이저 기계 옆에 앉은 과학자는 자기 조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27년간 괴물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내가 얻은 게 뭐게? 방에 가득한 괴물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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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다섯 살의 시시포스는 어쩌면, 어쩌면 이번에는 돌이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놓지 못한다. 일흔다섯 살의 시시포스에게는 그런 환상이 없다.
시시포스의 과제, 그리고 우리의 과제는 "참담한 운명을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우리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의식 있는 지적 존재가 어떻게 그렇게 단조롭고 무의미한 일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무가치함 때문에 자신의 일에 스스로를 던지면 된다. 카뮈는 이렇게 말한다. "시시포스의 운명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의 돌은 그 자신의 것이다. ......돌 속의 작은 원자 하나하나, 어둠이 내란 산의 작은 광물 조각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의 꼭대기로 향하는 그 투쟁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보부아르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에 온전히 동의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열렬한 영웅주의"라고 부른 것을 받아들이고 일 자체가 가진 마법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보부아르는 괴물로 가득한 방 안에 서서 마지막까지 계속해서 더 많은 괴물을 만들어냈다.